
한민규 기자 |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살면서 있었던 일들 모두를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않은 일은 잊어야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잊으면 않되는 일이 있다. 나라를 빼앗겨 독립운동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군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꽃다운 소녀들이 있었으며, 징용으로 끌려가 강제노역과 짐승같은 삶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 겪어야했던 쓰라린 상처이다. 이 상처는 우리 가슴에 각인되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6월10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 고주리순국선열 6인 합동 봉송식이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 정명근 화성시장, 유족, 김호동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 이범창 천도교 종무원장 등 각계내빈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같은 날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에서 안장식이 거행되었다.
1919년 4월 15일 일제 경찰과 헌병대가 제암리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바로 고주리로 달려가 발안만세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명인 천도교도 김홍렬과 그의 일가 6인을 처참히 살해하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순국하신 분들이 고주리순국선열 6위이다.
그동안 제암리 학살사건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고주리학살사건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는데, 봉송식을 통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발안과 우정, 장안의 만세운동>
고주리학살사건은 1919년 3.1운동 당시 발안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서 비롯 되었다. 1919년 3월31일(당시 발안장날은 음력으로 5일과 10일에 열렸다) 발안장날 장터에서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 천도교도 안정옥, 제암리 교회 전도사 김교철, 고주리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주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때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이 시위에 참여하여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오는 시위대에 칼을 휘둘러 이정근과 그의 동생 등 3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시위자들중 몇 명을 체포해 고문하고 풀어주었다. 이때 시위대는 일본인 소학교와 가옥을 불태웠다. 그리고 4월 1일에도 주민들은 발안장 주변 산봉우리에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지속하였다.
당시 3.1만세운동은 발안에서만 일어난게 아니라 인근지역에서도 일어났다. 발안에서 가까운 우정, 장안지역에서는 4월 3일 주민 2천여명이 떨치고 일어나 우정면사무소,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경찰주재소에서 순사 가와마타(川端豊太郞)을 처단했으며 3명의 주민들이 사망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우정·장안의 만세운동을 장단군 강상면 시위와 함께 ‘가장 광폭한 시위’로 꼽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4월4일 아리타(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군대를 동원하여 화수리를 포위하고 무자비하게 총질을 하고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주민들에게 몽둥이질을 해댔다. 이날 화수리에서는 3명의 주민이 살해당했고 가옥 19채가 불타버렸다.
그리고 4월5일에는 장안면 수촌리에서 아리타가 이끄는 일본군이 주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총질을 했으며, 8일에도 나머지 가옥에 불을 질러 전체 42채중에 38채가 전소되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만세운동은 잦아들지 않고 4월5일 수촌리와 제암리, 고주리 동네사람들을 비롯한 주민들이 발안장터로 모여 들었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주재소로 달려가 투석전을 벌이다 이정근, 김영태, 김경태가 죽고 10여명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중 이봉구는 혹독한 고문으로 수원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제는 4월8일 수촌리에 남은 가옥을 모두 불태워 총 42채 가운데 38채가 전소되었다. 4월10일과 11일에는 화수리를 중심으로 우정·장안지역 25개 마을에서 198명을 검거했다. 이중 52명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종결 결정을 받았으며, 기소된 27명 가운데 25명이 징역 1년에서 15년까지 유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잊지못할 4월15일>
일제는 향남과 팔탄지역의 시위를 진압하고 자국민보호와 독립운동의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위해 4월 13일 아리타 중위가 지휘하는 군대를 발안으로 파견하였다. 아리타는 사사카(左坂利吉)을 앞세워 시위 주모자로 지목된 우정면 화산리 김연방과 김태현을 죽였다.
그리고 4월 15일 제암리 주민들의 명단을 입수한 아리타는 부대를 이끌고 제암리에서 성인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고 문을 걸어잠근채 총을 쏘고 불을 질렀다. 멋모르고 교회에 모였던 동네 사람들은 학살을 당했고, 이 광경을 보고 남편을 부르며 뛰어나온 여인 2명도 살해하였다. 이렇게 23인의 영령이 일제의 손에 의해 눈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되었다. 이것이 이름하여 <제암리학살> 사건이다.
제암리에서 학살을 저지른 일제는 천도교 지도자이자 발안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흥렬이 사는 고주리로 향했다. 제암리와 가까운 거리에 고주리 마을이 있었는데, 고주리 사람들은 제암리의 참극을 보고 산속으로 모두 피신했다.
김흥렬 일가만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겠는가하고 집에 있었다(김흥렬의 조카 결혼 때문에 모여서 의논하느라 친척들이 집에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고 한다. 김흥렬, 김성열,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6인이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닦친 일본군은 백낙열의 행방을 추궁하다 답변을 얻지 못하자 김흥렬 일가 사람들에게 짚단과 나뭇가지를 덮고 기름을 뿌리고 생사람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고주리 주민들은 불태워진 김흥렬 일가 6위의 유해를 수습하여 팔탄면 덕우리에 안장했으며 유족과 천도교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지냈다. 팔탄면 덕우리에 있는 고주리순국선열 합동묘역은 봉분이 3기인데, 이것은 불태워진 시신 6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상태여서 어쩔 수 없이 3기의 봉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의 악랄함이 처연히 다가오는 부분이다.
고주리 순국선열 6인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팔탄면 공설묘지의 연한이 다되어감에 따라 선열들의 묘역을 어쩔 수 없이 옮겨야하는 상황이 되어 유족대표와 국가보훈부가 협의하여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고주리학살사건은 일제의 악랄한 잔혹함이 표출된 대표적인 만행으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않되는 역사의 교훈이다.
<참고문헌>
화성시사 - 화성 3.1운동의 전개와 특징
국가보훈부 -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