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규 기자 |
푸르고 높아야하는 가을하늘이 변덕스럽게 찌프린 날 한상업 화성시먹거리위원회 민간위원장을 찾았다. (한 위원장은 임기가 끝났지만 아직 3기 먹거리위원회가 출범하지 않아 본 인터뷰에서는 직함을 위원장으로 쓴다)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무거운 하늘을 이고 서 있었다. 지난 여름의 무더위에 한껏 지친 듯이 가지를 늘어뜨리고서.
한 위원장의 집 사랑채에는 동춘재(東春齋)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봄이 움트는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기나긴 겨울을 견뎌내고 마침내 찾아온 봄이, 움튼 집에서 한 위원장을 만났다.
40여년간 농사일을 해온 농민이라서 그런지 얘기 중에 계속 가을 추수와 그리고 농업관련 전화가 온다. 또 마을 앞 황구지천 건너 미군비행장의 비행기 소음이 가끔 대화를 막는다.
화성시먹거리위원회 민간위원장 4년 맡아 화성시먹거리종합계획 수립
한 위원장은 2020년 11월부터 올해 10월까지 화성시먹거리위원회 제1기, 제2기에 걸쳐 4년간 민간위원장을 맡아 화성시먹거리종합계획 수립과 화성시민의 먹거리기본권 보장을 통한 먹거리선순환체계 구축에 앞장서 왔다.
화성시먹거리위윈회는 ‘한 생명도 소외되지 않는 화성시! 시민의 삶을 바꾸는 지속가능한 화성먹거리’라는 비전을 갖고 제2차 화성시먹거리계획(2024~2028)을 수립했다.
제2차 화성시먹거리계획은 ‘농업농촌을 살리는 지속가능한 생산, 지역경제를 살리는 선순환 가공·유통, 세상을 바꾸는 정의로운 소비, 관계를 바꾸는 먹거리공동체, 지구를 살리는 생태적 순환체계’를 5대 전략 목표로 설정하고 민간 거버넌스 과정을 통해 세부전략과 정책을 제시했다.
농사지은 지 40년이 됐는데, 친환경 농업을 하고 나서 비로소 농민이 됐다
40년전 농사를 처음 시작해서 아무 생각없이 남들 하는데로 비료주고 농약주고 하다가 친환경 농업을 하면서 자연이 순환하는 원리를 알게 되었다며 한 위원장은 처음 농사지을 때를 회상했다.
“토양은 그냥 흙이 아니라 각종 미생물이 함유돼 있고, 식물의 생장 작용에 이 미생물이 절대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으며, 그리고 기후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세상이라는 것이 순환의 원리로 되어 있는 것”을 알게되며 비로서 농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농사는 철학이라는 깨달음
“토양에 있는 미생물이 농약이나 제초제로 인해 죽게 되면 소동물이 없어지고 소동물이 없어지면 먹이사슬 상위에 있는 동물이 없어지고 그 고리가 끊어지게 되면 생태계가 파괴되어, 결국 농산물을 생산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토양과 자연에 대한 순환 원리를 생각해야 되고, 또한 물이 어떤 작용을 하는 지 등 총체적인 생태계를 다각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농업이 곧 상당한 깊이 있는 철학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눈에 안보이는 형이상학적인 요소는 배제하고 눈에 보이는 형이하학만 신봉하는 시대
“배추를 볼 때 인터넷에 찾아보면 식이섬유,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칼슘, 철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과학적으로 보이는 것을 얘기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동의보감에는 ‘갈증을 해소한다, 당뇨병을 고치게 해준다, 장과 위를 통하게 해준다,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열을 제거한다’는 등의 효능이 나온다. 이게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경험에 의해서 축적된 약효”라며 곡기의 예를 들어 얘기를 이어갔다.
“옛날에 우리 선조들은 우리 먹거리를 곡기(穀氣)라고 그랬다. 곡기는 곡식 곡자와 기운 기자이다. 곡식 곡자는 보이는 것이고, 기운 기자는 안 보이는 것이다. 보이는 건 형이하학적인 것이고 보이지 않는 건 형이상학”이라고 말한다.
이 기는 눈에 보이지 않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작용하는 무언가를 일컫는다.
“이 기를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치부하기 때문에 모든 정책이나 전략이 왜곡되게 흘러가고 , 그 결과 유전자 조작식품(GMO 농산물) 등 오염된 먹거리를 인간이 먹어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정작 사람구실하고 사는 나이는 60~70세 정도에 불과해 진정한 의미로 수명이 늘었다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60~70세 이후에는 여기저기 아프고 요양원 들어가고, 사람구실 못하는 건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먹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원점에서 먹거리 문제를 다시 제기해야 된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산부터 다시 생각해야 된다. 인간은 공기가 입에 들어가는 걸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10분만 호흡하지 않으면 죽는다. 먹는 것도 그렇다. 입에 들어가는 먹거리를 통해 인간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약 428조가 1년 정부 예산인데, 민간하고 정부 예산해서 의료비로 100조가 나간다고 한다. 엄청난 비용이 의료비로 쓰이고 있다. 농업에 예산을 2조만 투입하면 100조가 들어가는 의료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먹는 것이 공기처럼 중요한 건데, 친환경 농업 예산과 건강한 먹거리가 선순환할 수 있도록하는 예산을 늘려야한다”고 강조했다.
먹거리는 단순하게 먹는 음식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으며,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먹거리의 생산부터 전과정에 걸쳐 친환경적인 이해와 세심한 관리를 통해 선순환구조를 만들어야하는 말이다.
민간 거버넌스 시대에서 화성시먹거리위원회의 역할
이 시대는 민간 거버넌스의 시대라고 한다. 현대사회가 복잡해지고 구성원의 요구가 다양하게 표출되기 때문에 과거의 관행과 일방적인 행정이 효용성을 잃었다. 이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민과 관계 전문가, 행정이 함께 손을 맞잡고 일해야 풀어나갈 수 있다.
화성시먹거리위원회는 전형적인 민간 거버넌스의 형태이다. 생산자인 농민과 소비자인 시민이 참여하고 유통을 맡고 있는 협동조합과 각계 전문가와 행정 등이 함께 안전한 먹거리, 공공재로서의 농업, 식량주권 등 미래비전을 제시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한 위원장은 “먹거리위원회는 농산물 생산에서 유통, 가공, 소비, 그리고 폐기과정을 포함하는 순환적, 통합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설정”하고 있다며 “나아가 안전한 식품생산의 가치가 주 목적인 친환경농업, 농민 및 소비자의 자치역량 강화, 식량 주권운동, 공공급식운동, 로컬푸드 등을 추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논의 및 종합계획 수립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 발행과 정책제안
화성시먹거리위원회는 화성시먹거리종합계획 수립과 화성시민의 먹거리기본권 보장을 통한 먹거리선순환체계 구축과 정책을 제안했다.
한 위원장은 화성시먹거리위원회를 처음에 접했을 때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있었는데 실제로 현실에 부딪혀 보니 좌절감도 맛보고 아쉬웠다고 한다.
“50 여가지 정책 제안을 했다. 비교적 합리적인 정책, 현실적인 정책 제안을 했는데,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먹거리 위원의 자질 문제도 있고 공무원의 자질 문제도 있는데, 행정의 경직성과 폐쇄성 등 행정 시스템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래도 먹거리위원회 운영보고서를 1기에 한번, 2기에 한번 내면서 정책제안이 다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앞서간 사람으로서 발자국을 남기는 노력을 한거지. 화성시에 각종 위원회가 그렇게 많아도 정책제안을 우리처럼 많이 한 위원회가 없다”고 한 위원장은 주장했다.
화성시먹거리위원회 민간위원장 직을 내려 놓으며
화성시먹거리위원회 1기 2년, 2기 2년 해서 4년간 ‘100만 시민의 먹거리 기본권 보장을 통한 지역 먹거리 선순환체계 구축’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한 위원장은 “연구 용역을 통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책제안을 했는데도 각 부서별로 이것을 못 받아주는 현실”이 안타깝다.
“3기 위원들한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적극적인 사고와 공부하는 자세로 행정과 민간 거버넌스의 실현을 목표로, 공무원하고 함께 손잡고 2기 때 세운 사업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부탁을 하고 싶다”고 한 위원장은 말했다.
먹거리위원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놓은 사업 계획이 사장되지 않고 일부라도 실행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다.
그래서 먹거리가 건강해지고 안전해져서 우리의 삶에서 '먹는 것' 에 대한 고민과 우려가 없어져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사람구실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한위원장은 기대하고 있다.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이 느티나무 잎을 흔들고 지나가지만 ‘봄이 움트는 집’인 동춘재(東春齋)에는 마침내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