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규 기자 |
지난 3일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선영에서 유가족과 동료 시인, 친우들이 모여 고 이규황 시인의 3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한도숙 시인의 사회로 이성희 시인의 헌화, 진길장 시인의 약력 및 경과보고가 이어졌으며, <사람과 땅의 문학> 동인인 용환신, 이은봉, 홍일선, 전무용 시인이 추도사와 추모시 낭독을 했다.
그리고 고향 도반인 이덕규, 전비담 시인이 이규황 시인의 시를 낭독했다. 유족인 아들 이솔과 시인의 형님, 그리고 시인의 친우들이 회고와 덕담의 자리를 가졌으며 마지막으로 헌화가 진행되었다.
이규황 시인은 평택시 서탄면 내천리 출신으로 오산중·고를 졸업했으며 한남대학교를 나와 모교인 오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85년 <한반도의 젊은 시인들>로 시작 활동을 시작하고 1987년부터 <삶의 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1992년 <경기민족작가협의회> 창립 사무국장을 지냈고 같은 해 『경기민족문학』 1호를 시작으로 1994년까지 『경기민족문학』 5호를 발표했다.
또한 전교조 오산화성지회 사무국장을 거쳐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전교조 오산화성지회 지회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직장생활과 시작활동, 교육운동에 너무나 헌신적이었던 이규황 시인은 활화산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삶을 36세라는 푸르른 청춘의 나이에 끝내 내려놓았다.
이규황 시인 30주기 추모식에 모인 사람들은 유수와 같은 세월 속에 성성해진 백발의 노인이 되었지만 형형한 눈빛 속에 먼저 간 시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날은 따스한 봄 햇살이 빛나는 꽃피는 계절이었다.

<추 모 사>
- 용환신
오늘 우리는 29년 전 우리 곁을 떠난 이규황 시인을 추모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유고시집 『두 몸 강물되어 하나로 흘러라』 이 한 권의 시집을 뒤로 한 채 서른여섯 젊디 젊은 그대로 세상을 등진 시인을 막상 추모하려니, 세월만큼이나 그 많던 사연들이 저 멀리 흘러가 버린 듯하고, 이승에서의 너무나 짧았던 인연 때문인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뜨겁기도 했고, 그만큼 외롭기도 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리움과 회고의 감정으로도 복잡한데 그동안 내세울 것 없이 살아온 이 시대 이런 우리를 보고, 시인은 「오늘」을 외면할런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쓸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전 그의 품성에 비춰, 우리들의 부족함을 감싸주리라 믿고 잠시 불러 만나보려 합니다.
모두가 고단하고 고단하던 시절 만난 이규황 시인은 누구보다 더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산고등학교 국어 선생으로, 전교조 오산·화성지회장으로 그리고, 대내외 문학 활동으로 밤낮없는 분주함과 밀려드는 긴장을 홀로 견뎌야 하는 외로움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경기민족문학협의회 사무국장이라는 짐 하나를 더 얹어주려 할 때 온몸에 묻어나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미소 가득 받아 주던 그때의 그 모습을 어찌 잊겠습니까?
교통도 신통치 않던 시절, 오산과 수원을 오가며 한번도 고단함을 표현한 적 없었지요.
어느 늦 가을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종종 들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던 시장 순댓집 골목 주점에서 띠동갑인 나에게 「형이나 나나 소대인지라 일복은 타고난 팔자」라며 얼큰하게 웃으며 던진 그 말이 유일한 하소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날 밤 같이 따라 웃었던 그 웃음이 슬픔이었던 것을 지금에서야 겨우 짐작할 뿐인데, 오늘은 그마저 그립습니다.
그리고 「경기민족문학협의회」 기관지와 「사람과 땅의 문학」 결성을 준비하던 그 무렵인 그해겨울, 평택 내천리 시인의 생가 근처 빈 농가 한 채를 빌려 회합할 때, 문학에 술을 얹고, 술에문학을 섞어 밤새 뜨거움을 나누면서, 인간의 깊이와 문학에 대한 성찰 등에 대해, 헌신적인 그의 열정을 봤던 그 밤.
우리는 그의 아픔을 생각치 않고 오직 믿음이라는 한마디 말로 치부한 채, 그 후 이어지는 모든 작업들을 그에게 다 넘겨 버렸지요.
매일 매일이 숨찼던 하루였지만, 그 분주함 속에서도 하루가 끝나는 늦은 밤까지 수많은 시를 지으면서도 자기 시집 한 권 내자고 고집부리지 않았던 것을 당연시 해버린 것이 부채로 남아 시인이 떠나고 1주기 되던 1998년 봄, 우리들은 우리들의 방식대로 글자 그대로 유고시집 한권 엮어 헌정한 것으로 그 빛을 갚으려 했습니다. 얼마나 염치없는 짓이었는지 오늘까지도 가슴 허허롭습니다.
끝으로, 유고시집을 발간하면서 회상했던 글을 여기에 옮겨 올리면서, 추모의 마음 하나 덧붙이려 합니다.
시인이 떠난 1997년 그 해 겨울 어느 날, 그의 습작노트와 함께 누렇게 바랜 원고지, 그리고 광고지 뒷면을 채운 시편들이 들어있는 낡은 봉투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의 시를 밤새워 읽으며, 그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보고 시를 정리하면서, 그가 참으로 시인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시들을 한 자리,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을 수 있게 된 것이 그를 위하여, 그리고 좋은 시집을 갖게 될 우리 모두를 위에서나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생전에 시집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 그리움으로 남은 사람 이규황시인을 추모하며
<이규황 시인을 추모하며>
- 이은봉
시인 이규황 선생이 이 땅을 하직한 지 30년이 지났다니,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규황 시인은 이곳 평택시 서탄면 내천리 출신이지만 저와 함께 대전의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저한테는 대학의 한참 후배지만 이규황 시인은 저를 비롯한 <삶의 문학> 동지들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시를 통해, 문학을 통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문화 정책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문예 운동에 나섰습니다.
1980년대 초 저는 산업체부설학교인 해천여고에서의 해직되고, 민중교육 사건 등 여러 가지 사건에 쫓겨 대전에서는 살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형편이 이러하니 아내의 권유에 따라 저는 서울로 올라가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자연스럽게 이규황 시인과 함께하는 대전에서의 문예 활동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한반도의 시인들》, 《삶의 문학》8집 등에 이규황 시인이 시를 발표할 수 있도록 나 나름으로는 애를 좀 썼습니다.
그런 이후 학원 강사 등을 거친 이규황 시인은 모교인 오산 고등학교로 돌아가 문학운동 운동만이 아니라 전교조 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는 동안 술도 많이 마신 듯 합니다. 이런 일들이 그의 건강을 망가뜨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던 중이었습니다. 그가 1997년 6월 간경화로 투병하다가 이승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그런 이후 나는 이규황 시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유고 시집을 발간하는 일, 그것이 그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이 일에는 저보다 전무용 시인이 훨씬 적극적으로, 헌신적으로 앞장을 섰습니다. 시를 모으고 정리해 원고를 만들고, 그리고 제가 시집 뒤에 해설을 써 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아, 출판비 마련을 위해 조금씩 모금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유고 시집 《두 몸 강물 되어 하나로 흘러라》는 이규황 시인이 이승을 떠난 지 꼭 1년 뒤에 발간되었습니다. 잔디가 파랗게 돋은 그의 유택 앞에서, 그러니까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유고 시집을 바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때 그날 어린 두 자식이며 예쁘고 아름다웠던 부인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유고 시집이 발간된 이후 저희 모두는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허겁지겁 시달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야속한 것이 세월이라는 놈입니다. 세상 일에 탁업지급 시달며 사는 동안 저도 삶의 문학 동인들도 이규황 시인을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규황 시인의 헌신과 희생과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제법 민주화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동안 그동안 곡절이 없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동안 온갖 상처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물론 온갖 고통이 없지 않았습니다. 많이 아팠습니다. 많이 괴로웠습니다.
많이 아프고 괴로웠더라도 이제 이 나라는 전 세계의 모범이 되는 민주주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촛불 혁명을 통해, 빛의 혁명을 바탕으로 이 나라 대한민국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우르러보는 멋진 나라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규황 시인이 노력과 헌신과 희생이 쌓여 만든 것이 지금의 이 나라입니다.
그가 고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도 고마움을 표하며 그럼 이것으로 이규황 시인 30주기 추도사를 가름하겠습니다.
2026년 4월 3일
《삶의 문학》을 대표하여 이은봉 올림
<서른 번의 봄, 다시 부르는 이름>
— 고(故) 이규황 시인을 기리며
- 이 성 희
시간의 긴 터널을 지나며 계절이 또 바뀌었습니다.
지루했던 긴 겨울 지나고 약속처럼 봄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들판 가득 새순 돋고 봄꽃 피어 아름다운데,
그대 없는 빈자리로 더욱 그리운 이여.
어느덧 서른 번의 봄이 다시 피어났습니다.
그대 떠난 뒤에도 황구지천은 쉼 없이 흐르고
내천리 고향 마을 뒷산 가득
진달래와 개나리, 목련과 매화, 이름 모를 봄꽃들이 피어납니다.
아이들 교실마다 참자유의 빛을 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불태우던 그대의 뒷모습.
이 땅 위 가장 뜨거운 문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참교육의 길 위에서 그대는 스스로 한 자루 촛불이었습니다.
어두운 시대를 밝히려 자신의 몸을 온전히 녹여내며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속에 정의의 씨앗을 심던 사람.
그 뜨거웠던 열정이 그대의 육신을 지치게 할 때조차
그대는 남겨질 시대를 먼저 걱정하던 고결한 스승이었습니다.
친구여, 그대가 온몸으로 써 내려갔던 그날의 시편들은
이제 시들지 않는 꽃이 되어 교정의 담장을 넘어,
우리가 걷는 민주와 평화의 세상 속으로 향기롭게 흩날립니다.
그대의 헌신으로 피어나는 오늘 이 봄날의 찬란한 풍경 속에
우리는 비로소 그대가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을 봅니다.
먼 길 먼저 떠난 이여,
불러도 불러도 그리운 이여.
오늘 우리가 모여 바치는 이 노래는
그대가 못다 부른 노래를 이어 부르겠다는 약속입니다.
시인이자 투사였고, 누구보다 따뜻했던 나의 친구 이규황.
세월 흘러 산천의 모습은 변해가도
그대가 심은 민주의 나무와 ‘사람과 땅’의 문학은
해마다 푸른 잎을 틔워낼 것입니다.
이제 무거운 짐일랑 그만 내려놓고
아픔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찬란한 봄꽃으로 피어나소서.
<이 사람 규황이>
- 전무용
그대 떠나던 날
그대 누운 이 자리 주변에
엉겅퀴 꽃 활짝 피었더구만.
그대 찾아와 보지 못한
지난 서른 해 동안도
엉겅퀴꽃 또 피고 피었겠지.
엉겅퀴꽃 무심하게 피고 지는 동안
그대 아이들도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가겠구만.
그대도 보고 있는가,
이 봄 온 세상이 겨울잠 깨어나며
개나리 진달래 황구지천 벚꽃까지
온통 만발하고 있구만.
이 사람, 규황이,
무시로 마음 속에 떠오르던 그대를
오늘은 이렇게 찾아와 불러 보는구만.
세상은 제자리걸음 하듯 하고 있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그대가 살던 그 시절 그 나라가 아닐세.
우리들 아무것도 이룬 일 없이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살았지만,
때때로 분노하며
때때로 마음 졸이는 동안
조금씩은
그대가 꿈꾸던 나라가 되어 왔네.
얼마간은
그대가 꿈꾸던 세상이 되어 있네.
그대보다 오래 살았지만,
뭐 딱히 이렇다하게
그대보다 더 한 일도 없는 것 같구만.
그래도 이 봄에는
세상 좀 좋아졌다는 말을
중얼중얼 전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네.
그래도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기운 넘치던 그대 두꺼운 손
잡을 수 없기 때문이지.
그대 넓은 어깨 넉넉한 가슴
한 번 안아볼 수 없기 때문이지.
문득 문득 그리웠지만,
참 오랜만에 이렇게 불쑥 찾아와
그대 이름 한 번 부르네.
이 들판 산들바람에 그대 맡기고
우리 또 떠나가면
불쑥 불쑥 무시로 그대를 기억하며
무심히 세상 살아 가겠지.
우리도 순서 없이 그대 뒤따라 가겠지.
편히 쉬시게,
황구지천 진위천 들꽃향기 감도는 이 언덕에서
편히 쉬시게, 이 사람 규황이!
<다시, 이규황에게>
- 강병철
이맛살 맞대고 빨간 펜 긋던 손바닥 원고지
이젠 됐다, 우체통으로 달리던 자전거 페달
그대, 저무는 철둑길 포장집에서
그대, 운동화 끈 졸라매고 막걸리 따르던
그해 6월 최루탄 터지던 아스팔트 한복판
젊은 몸들 소스라치며 흩어질 때
그대, 저항의 근육질 깃발로 버티면서
그대, 민주주의 다지던 시린 시국 지나고
전동타자기에서 이메일, 스마트폰, AI까지
분단의 철조망 열리고 또 닫히면서
빛의 속도로 흐른 30년
대통령이 일곱 번 바뀌던 격동의 시국
그대, 가는 곳마다 이름 석 자 출몰하는가
그대, 출근길 지하철 손잡이나 설거지통 배수구
컴퓨터 글자판이나 목욕탕 전신거울
새벽 꿈자리 발가벗은 몸으로
열혈 청년에서 굽은 등 초로까지
떠나간 그림자 떠올리며
괜찮다 괜찮다 길지 않지만 잘 살았다
시인과 스승, 밤길 치달리던 거리의 투사
짙은 안개 헤치던 도수 높은 안경알로
두 몸 하나 되어 강물로 흐르며
아직도 넉넉한 그림자로 다독이고 있는가
이렇게 많은 벗들이
헤어지기 위해 모일 줄 몰랐다며
그대, 구천에서 허허롭게 웃고 있는가
그대, 자작나무 꽃등불 아직도 밝히는가
<규황 심우도>
ㅡ화성 정문리에서 2026.4.3
- 홍일선
전생 후생
그 소 발자국을
그 소 그림자를 찾아 헤매야만 하는
우리 운명이 있었지요
그 소 고단한 눈동자 속에서
규황 심우도
내천리 황구지천 시편들이
대대로 자재연원하였음이지요
공경 이규황시인
이따가 내천리에서 만나게 되면
아직 나는 못보았구
규황시인만 본 그 소 발자국 이야기
영험한 심우도 한소식
조용히 들려주소서
삼가 법공양으로 받겠나이다
<후배 이규황 시인 사후 30주기>
- 이재무
오늘은 서른 해 전 세상 바깥으로 떠나 소식이 돈절된 후배 이규황 시인 사후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가 떠난 후 서른 번 째 봄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나보다 4년 아래로 물봉처럼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무엇보다 시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 후 교사에 임용되기까지 두어 해 학원강사를 지냈는데 거기서 만난 제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입이 찢어져라 크게 웃던 모습이 어제인 듯 눈에 선하다.
그런 그가 장가든 지 다섯 해도 못 채우고 간경화를 앓다 비명해 갔으니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그와 어지간히 대작을 한 나로서는 본의아니게 그의 죽음에 일조한 셈이니 오호 통재라 이 죄값을 생전에 어찌 다 치룰 수 있으리오.
각설하고 이 사람 규황이, 거기 세상은 지낼 만하는가?
환한 봄날 자네를 추억하기 위해 경향각지에서 모여든 사람이 수십이 넘네. 그건 생전에 자네의 삶이 그윽하게 깊고 넓었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곧 뵙겠네. 그 좋아하던, 더운 술 한잔 따라 올릴테니 달게 드시게나!
이만 총총
백강 이재무 삼가 몇 자 적어 올림.





